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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도는 성과 생존의 에너지이며 근본적으로 남, 여의 성 구별이 나뉘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성과 생존의 에너지인 리비도는 몸의 여러 구멍에 충동의 궤적을 긋는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이유는 항상 욕망의 대상이 닿을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항상 알 수 없는 대상의 대체물을 통해 채워질 뿐이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결여된 상태를 채우는 행동에서 타인들에게서 이미 형성된 대체물을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어진 욕망방향을 무조건 수행한다고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 대다수가 향하는 욕망의 방향의 기초는 어디서 나오는가? 나비효과처럼 작은 날갯짓에서 시작하는 것인가? 음모와 자본의 교묘한 전술인가? 시대의 결여? .. 모르겠다 .. 욕망을 채워주는 대체물들, 그 페티시즘의 기원 .. 을 나는 아직 찾고 있다 .. 욕망의 뒤틀림이란 것은 알지만 그 시작과 방향 말이다. 단지 성기의 연장과 상징인가? 성의 역사, 도착증, 절시증에 대해 알고 싶다.

욕망 대상의 '발견'이 아닌 발명!? 헤게모니에 대한 재고찰 필요.

공주병적 욕망은 팔루스가 되고자 함도 있지만 이 곳에서 배운 좀 더 점잖은(?) 해설은 다르게 설명한다. 결여의 공백, 남성들의 눈에 있는 구멍을 발견하고 그것을 쑤시고자 함이라는 여'자'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구멍은 충동과 큰 연관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구멍이 아닌 페티시즘은? 구멍의 연장인 것이다.

욕망의 근원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 상징적, 개념적 그것의 모방물, 대체물인 욕망을 빚는 재료는 언어이고 이미지 등등 이다. 냄새, 성기 등등.. 구멍을 채우는 무언가 라고 여겨진다. 언어는 귀를 채워넣고 입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글은? 구어적 언어의 연장인 것인가.. 구순기.. 빠는 것에 관련이 있어 보인다.. 푸코의 진자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느낌..

타자가 원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굳이 생존이 아니라 성도 포함되는 리비도와 관련되 있는 듯 싶다. 타인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나의 리비도 역시 장기적으로 충족될 수 있음을 안다? 기엔 .. 아니면 양보심리?

욕망의 대체물, 페티시즘의 대상들은 결코 완벽하게 자아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 결여가 남고 그것은 다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이란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잠잠해지고 다시 부풀어 오를 뿐이다. 상징물, 실재물이 제공됨으로써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끔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뭔가? 흠..

본래적 결여는 주체적 주체의 갈망대상 발명으로 채워지는데 그것이 강한, 주체성이 강하고 독립성이 강한 사람(?)은 그래서 환상, 판타지아를 좇는 것 같다. 게임은 약간 수동적이고, 만화도 약간 그렇긴 하지만, 더 상징적이고 현실적 그릇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예술적 감각을 가진 사람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글이란 자유도가 아주 높고 빚기 쉬우며 구강 주위에 머무른 충동과 관련되어 있다. 나 역시 환상을 좇는 자로서 .. 이미지든 구강이든 환상이 필요할 듯 싶다. 게임이 제공하는 그릇에 불만족스러워 할 가능성도 있겠다.

조종사의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열망, 전투기에 대한 페티시즘, 건축을 원하는 자의 환상의 현실구현 같은 로망은 엄청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물질의 거대함과 그 지극한 리얼리티, 현실감은 만화나 글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과도 다르다. 그 엄청난 리얼리티를 획득하는, 지극한 현실감을 획득하는.. 하지만 환상과 주체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 그 끝과 대미는 건축주와 건축가가 동일할 때, 지극한 리얼리티와 자본으로 거대건물을 건설 하는 것, 조종사의 항공기 역시 게임이 제공하는 그릇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환상이란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다. 현실발현이라고는 좀 표현이 아닌 듯 싶다. 무의식적 발현이라면 그야말로 주체정의 거대함이 나타나는 것이고, 환상의 그릇과 구조가 언어따위에 의해 제공되고 주어지고 자유도가 낮아지면 그만큼 주체도는 떨어진다.

욕망의 근원에서 태어나는 1차적 욕망 그 이상으로 대체물로 채워질 수 없는 나머지 결여에서 태어나는 2차적 욕망이 있다.

승화의 개념 vs 주이상스, 쾌락..
죽음충동?
승화도 아니고 쾌락도 아닌 둘 다에게 불완전한 여전한 결여를 머물고 끝맺지 못한 결여와 욕망이 누더기가 되어 떠돌고 있다.. 구멍과 구멍의 연장을 따라서 ..!

채워질 수 없는 이상을 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충동의 비상징적, 실재계적 충족을 요구하는 것을 보수적 태도라 매도하는 것 역시 설득력 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리비도의 승화라는 것이 큰 에너지로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자의 담론

리비도 2011. 2. 21. 00:08

 라깡은 타자의 욕망을 개인의 형성에 자꾸만 주입시킨다. 생각해보자. 나 또한 누군가에게 타자가 될 수 있다. 나 또한 다른 개인의 형성에서 타자의 지위를 차지 할 수가 있다.
 나를 찾는다는 개념자체에 언어유희가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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